본문 바로가기

듣는

브렌델의 하이든 - 피아노 소나타




J.Haydn : 11 Piano Sonatas


Alfred Brendel


Philips



 명성에 비해 유독 인기가 없는 작곡가는 아무래도 두 H씨, 그러니까 헨델과 하이든이 아닐까 싶다. 각자 바로크 시대와 고전파를 대표하는 거목이지만 하필 비교 대상이 바흐와 모차르트라서 그런 걸까? 클래식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름조차 모를 말러나 브루크너가 클래식 애호가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것을 떠올려볼 때, 정작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는 헨델과 하이든이 클래식 애호가에게 외면받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지간한 클덕이 아니고서야 즐겨듣는 헨델과 하이든의 곡이 몇이나 될까? 헨델은 메시아, 왕궁의 불꽃놀이, 수상음악 정도에서 끝날 테고 하이든은 첼로 협주곡과 천지창조 수준에서 마무리될 것이다. 사실 나 역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헨델은 오르간 협주곡 op.4를 제외하면 딱히 아끼는 곡이라 할만한 곡이 없다. 아직은 미지의 영역인 헨델의 오페라에 발을 들여놓으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있지만.


 하지만 하이든은 다르다. 아마도 난 하이든이 홀대받는 현실에 개탄하는 소수의 클덕 중 하나일 것이며 모차르트보다 하이든에게서 훨씬 더 많은 즐거움을 얻는 소수일 것이다. 물론 피아노 협주곡이나 오페라에서의 모차르트는 하이든과 비교를 불허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두 작곡가가 나란히 열정을 쏟았던 피아노 소나타와 교향곡에서는 모차르트보다 하이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교향곡과 관련해서는 나의 글 쓸 음반 목록 중에 노링턴의 하이든 교향곡 음반이 있기에(그것도 높은 우선순위로) 여기서는 피아노 소나타에 대한 얘기만 해야겠다. (여기서 난 부득이하게 현악사중주를 언급할 수 없었는데, 이는 내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현악사중주 음반을 이제 겨우 각각 3장과 2장씩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파 작곡가로서의 하이든이 지닌 최대의 강점은 '유머'가 아닐까 싶다.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하이든의 교향곡과 피아노 소나타의 핵심은 유머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모차르트나 초기의 베토벤에게서도 유머를 느낄 수 있지만, 하이든의 그것은 각별하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도 유머를 찾을 수 있지만, 유머보다는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청명한 간결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베토벤은 초기작에서 젊은 작곡가의 장난기를 쉽사리 접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진지하고 심각한 면모가 보다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렇기에 하이든인 것이다. 고전파 시대의 미덕 중 하나였던 '유머'를 느끼기에 하이든보다 좋은 작곡가가 없다는 말이다. 하이든은 작곡가 본인이 유머감각이 있는 인격자였다고 전해지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절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된다. 여기서 난 대다수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말년에 이르러서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했던 르누아르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이든 역시도 인간과 삶에 대한 따뜻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기에 음악에서의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제는 음반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피아니스트 본인의 말마따나, 청년 시절부터 '노년풍'의 연주를 한다는 평을 들은 브렌델이기에 그의 하이든을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던 것이 사실이다. 마침 고클에서 이 음반의 공구가 저렴한 가격에 추진되어 엉겁결에 지르게 된 음반이기도 했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음반은 브렌델에 대한 전반적인 나의 불신을 해소해 준 고마운 음반이 되어줬다. 다행히도 브렌델의 '노년풍' 연주는 굳이 과장하지 않고 하이든의 우아한 유머를 자연스레 청자에게 전해준다. 우리는 이 위대한 작곡가와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던지는 수준 높은 유머를 있는 그대로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언제 꺼내 들어도 처음 들었을 때의 감흥을 잃지 않는 소중한 음반. 이 음반 역시도 내가 평생을 가까이할 소수의 음반 중 하나일 것이다.




덧. 어제 고전파와 바로크 시대의 주요 곡들을 시대 악기로 연주한 음반들을 뒤적거렸는데 뒤적거린 곡 중 하이든의 피아노 작품들도 있었다. 쇼른스하임과 브라우티함의 박스셋 2종이 보이는데 장수가 워낙 많은지라 덜컥 사기는 약간 부담스러운 느낌이었고. 지금 열심히 진행 중인 바부제의 사이클도 첫 시작부터 주목하고는 있었는데 무지막지한 가격이 부담될뿐더러 이 사이클도 분명 나중에 박셋으로 묶여 나올 터라 차마 지금 질러주지는 못하겠다. 이래저래 하이든의 피아노곡 음반은 질러주기가 애매한 느낌.


덧. 글 중간에 나온 고클의 공구가 불미스럽게 종료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성질이 난다. 얼치기들의 얼토당토않은 딴지로 그 좋던 공구가 어이없게 끝나버린 일을 떠올리니 새벽에 분통이 터질 지경.


덧. 저번 스즈키의 바흐 앨범을 쓰면서도 느낀 건데 난 '들으면 미소가 지어지는 음반'을 좋아하나 보다. 어째 연주를 설명할 때마다 같은 단어가 중첩되어 쓰이니 뭔가 이상한 느낌. 기시감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뭐 아는 게 없을수록 글은 추상적으로 되는 법이니 당연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