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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나가노의 진은숙 - 로카나



진은숙 : Rocana


Orchestre Symphonique de Montreal

Kent Nagano (cond.)


Analekta



 현대음악을 주제로 글을 쓰는 건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가장 추상에 가까운 예술인 음악을 통해 구체를 획득하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일일까? 많은 작곡가들이 음을 이용해 무언가를 묘사하거나 서술하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거둔 성과는 다른 예술에 비해 미미할 따름이었다. 애초에 글자가 모여 단어가 되고 의미가 형성되는 문학, 혹은 선과 색이 모여 구체적 형태를 이룰 수 있는 미술에 비해 음악은 음과 리듬이 모여도 아무런 유의미를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곡가들의 무수한 시도가 있었음에도 순수한 음악을 통한 묘사나 서술은 이상에만 머물러, 곡의 제목이나 글로 된 부수적인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완전해질 수 없는 수준에 머물러야만 했다.


 여기서 '진은숙님의 로카나는 음을 통해 구체를 획득한 획기적인 곡이다!'라고 해야만 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이 곡을 소개하는 이유는 나에게 진은숙의 로카나가 음악을 통한 묘사에서 하나의 정점에 이른 곡이기 때문이다.


 로카나의 성공 요인은 전적으로 작곡가가 묘사할 대상을 사려 깊게 선택한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음을 통해 구체적인 물질적 성질을 묘사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성공적인 묘사를 위해서는 그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로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room of light'라는 뜻이라 한다.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이 묘사할 대상으로 '빛'을 선택한 것이다. 이미지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빛이 구체와 추상의 경계에 위치한 것이라 생각한다. 언제나 존재를 느낄 수 있지만 직접적인 형태는 느낄 수 없는, 존재는 구체적이지만 존재방식은 추상적인 그런 이미지이다. 작곡가는 '빛'을 묘사의 대상으로 선택하여 까다로운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걸 통해 성공적인 결과로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작곡가는 빛의 왜곡, 굴절, 반사, 파동과 같은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다고 한다. 내 추측에 여기서 작곡가가 묘사하는 빛의 모습은 우리가 눈을 통해 직접 보는 빛이 아닌, 눈을 감았을 때에만 볼 수 있는 빛의 모습으로 보인다. 곡의 음색과 리듬은 정말 화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음색이 빛의 색깔이라 한다면, 리듬은 섬광이 번뜩이는 여러 순간일 것이다. 음악을 듣는 우리에게 보이는 환영은 현란한 색의 빛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이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단지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풍경 말이다. 작곡가는 추상적인 음악을 통해 추상적인 상을 구체적으로 청자에게 제시해준다. 내가 '묘사'의 정점에 이른 곡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현대음악이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졌는지 웅변하는 멋진 곡. 이런 멋진 곡은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이 들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여전히 현대음악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이럴 때면 현대음악이라는 꼬리표가 갖는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보석들이 현대음악이라는 이름표에 눌려 숨겨져 있을지 생각하면 더더욱 슬퍼지고. 물론 지금의 나도 현대음악은 잘 모르긴 하지만 말이다.




덧. 로카나가 음악을 통한 '묘사'의 정점이라고 한다면, 음악을 통한 '서술'의 정점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거기서 자세히 이야기할 테지만.


덧. 빛과 비슷한 이유에서 바람 또한 음악을 통해 훌륭하게 묘사된 경우가 많다. 베토벤의 교향곡 6번 4악장, 알프스 교향곡, 피터 그라임즈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폭풍 장면에서 바람의 묘사는 무척이나 강렬하다.


덧.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음반에서 로카나보다는 바이올린 협주곡에 더 주목할 것이다. 나 역시 실연으로 듣고 많이 감탄한 곡이고 글을 쓰며 다시 들어 이번에도 감탄한 곡이지만, 나에겐 로카나가 보다 신선하게 들렸기에 로카나를 주제로 글을 썼다.


덧. 외국 작곡가들의 이름을 쓸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글에서 진은숙 진은숙 거리니 뭔가 예의 없는 기분이 들어 괜히 죄송스러워진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이상 다 작곡가로 호칭을 바꿨는데 그것도 참 어색하구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