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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치메르만의 리스트 - 피아노 소나타




F.Liszt : Piano Sonata in B minor


Krystian Zimerman


Deutsche Grammophon (DG)



 올해 1월 3일에 쓰다가 마무리하기 애매해 비공개로 처리했던 것을 이제야 쓰는구나. 자소서 쓰기 싫으니 별짓을 다 하네 정말. 이제 보니 예전 글에서는 한번에 다루기 힘든 주제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려 했던데 마무리하기 버거웠던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하고. 확 갈아엎고 곡과 연주에 대한 감상만을 써야지.

 

 치메르만(짐머만이라 쓰는 것이 더 익숙하긴 하지만)의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앨범을 듣는다. 베토벤 후기 소나타 다음으로 내가 가장 아끼는 피아노 소나타가 리스트의 것인데 무척 오랜만에 듣는 느낌. 


 치메르만은 장대한 곡의 규모와 리스트라는 이름이 주는 선입관에 굴복하지 않은 드문 연주자이다. 리스트가 으레 갖는 '악마적'이라는 인상에 매몰되어, 혹은 30분의 단악장 소나타라는 황당할 수 있는 규모에 짓눌려 이 위대한 소나타를 쇼피스로 전락시켰던 무수히 많은 연주들을 떠올려보라. 얼마나 많은 연주가 곡의 빛나는 화성을 후루룩 짭짭 쾅쾅 손가락 놀림으로 퇴색시켜왔던가. 성냥으로 세운 탑처럼 자칫하면 무너질 아슬아슬한 곡의 균형을 얼마나 많은 연주가 어설픈 템포 조절로 망가뜨려 왔던가. 얼마나 많은 연주가 과장된 다이내믹으로 곡을 싸구려 희극으로 만들었던가. 


 치메르만의 미덕은 '굳이' 손가락 빨리 돌리려 하지 않고 '굳이' 어설프게 템포 가지고 장난질하지 않고 '굳이' 과장된 다이내믹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점에 있다. 덕분에 청자가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찬연한 곡 본디의 화성과, 그렇게 이것저것 쑤셔 넣었으면서도 희미하게나마 이어지는 소나타로서의 일관성과, 압도적인 건축물과도 같은 곡의 구조이다. 연주자가 곡으로 욕심내지 않았을 때, 혹은 반대로 곡에게 기죽지 않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대표적인 연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아직도 '순례의 해'와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전곡 음반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것도 빨리 해결해야겠다. 곡이 쓸데없이(이런 표현이 용납된다면) 많아서 그렇지 리스트도 한다면 하는 작곡가였으니까. 진지한 작곡가 리스트를 만나려면 '순례의 해'와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이 제격이겠지. 하지만 뭐 빨리 들어봐야 할 곡이 한두 개인가.




덧. 내가 생각하는 망쳐진 연주의 대표적인 예는 호로비츠의 77년 녹음이다. 그걸 들으면 난 호로비츠가 얼마나 위대한 연주자였는지를, 그리고 그가 얼마나 피아니스트로서의 타고난 재능이 뛰어났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