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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에센바흐의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21번

 가끔은 공연이나 음반에서 원래 기대했던 곡이 아닌 다른 곡에 더 깊은 감명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곡을 기대하고 간 공연인데 정작 다른 곡(특히 앵콜!)이 더 좋았다던가, 요 곡을 들으려고 산 음반인데 오히려 신경 안 쓰던 곡을 더 잘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원래 기대했던 곡이 별로였다는 얘기겠고 미화해서 말해보자면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당연히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면 후자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고^^




F.Schubert : Piano Sonata No.21 in B flat major, D960


Christoph Eschenbach


Harmonia Mundi France (HMF)



 위 음반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를 들으려고 산 음반이다. 에센바흐의 D960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기분 좋은 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지. 한 곡의 여러 연주를 듣는 쪽에 큰 취미가 없는 나로서는 D960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러려니 했을 정도였을 뿐이다. 아, D960의 추가로 2CD가 됐는데도 1CD 가격만 받는다는 점은 무척이나 고마운 점이었지. 하지만 음반을 받고 D960을 듣게 되는데... 요거 좀 문제가 있다.


 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만큼 곡을 듣고 작곡가를 맞추기 쉬운 곡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심하게 말해 별다른 리듬의 변화도 없이 단조롭게 땡 땡 땡 땡 땡 땡 거리며 뭔가 텅 빈 듯한 느낌에다 선율 좀 좋으면 그게 슈베르트 아닌가? 아무런 잔재미도 없어 다른 모든 것의 인상은 흐릿하고 선율만 붕 뜨며 부유하는 느낌, 그것이 내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판별하는 요령(?)이다. 곡이 이래서인지 대부분의 연주들도 여백을 채우려 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터벅터벅 걸어나갈 따름이고. 마치 빈 공간은 청자에게 맡기겠다고 말하는 듯이..


 하지만 여기서의 에센바흐는 전혀 다르다. 에센바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가곡의 연장 선상으로 바라보는 걸까? 에센바흐는 왼손의 존재감을 최소한도로 억제하며 오른손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해두려 한다. 왼손이 가곡의 반주자라면 오른손이 성악가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에센바흐의 시도로부터 얻는 것은 어떤 연주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오른손의 압도적인 정보량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곡의 미약한 수직적 구조이다. 이는 에센바흐의 깊은 페달링과 어우러져 시종일관 아름답게 '노래하는' 피아노를 만끽할 수 있게 해주지만, 곡의 갈피를 잡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게 한다. 일장일단,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나는 이 연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작곡가 슈베르트의 가장 큰 강점이라 할 수 있는 선율미를 한껏 부각시켰다는 것에 집중해야 할까? 아니면 작곡가 슈베르트의 단점인 구조적 미숙을 악화시켰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까? 아마 난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 연주에 대한 확실한 평가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지금의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건 있다. D960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연주를 어떻게 받아들이던 간에 들어보면 좋으리라라는 것, 그리고 난 이 연주를 자주 듣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