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듣는

쉬프의 야나체크 피아노 소나타



Leoš Janáček : Piano Sonata 1.X.1905


András Schiff


ECM



이 음반을 들을 때면 항상 야나체크의 피아노곡은 비교할 작곡가가 없는, 야나체크만의 고유한 음악을 들려준다는 생각을 한다. 후기 스크리아빈과 더불어 자기 색이 가장 뚜렷한 작곡가라는 느낌. 대체제가 없다. 야나체크를 듣고 싶으면 야나체크를 듣는 수밖에.


야나체크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면 '상실'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억눌린 슬픔과 미묘한 덧없음의 혼재. 이런 추상적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정말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아, 같은 체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야나체크 피아노곡을 들으면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떠오른다는 것도? 현사나 관현악곡을 들을 때는 그런 느낌이 없는데, 유독 피아노 독주곡만 들으면 그렇다. 이유가 뭘까?


피소는 초연 시 전체 3악장 구성이었다고 한다. 1악장 '예감', 2악장 '죽음', 3악장 '장송행진곡'으로. 하지만 초연 후 야나체크는 3악장이 마음에 안 들어 3악장을 버렸고, 나중에는 곡 전체가 마음에 안 들어 곡을 아예 폐기해버렸다고. 야나체크는 자신의 충동적인 결정을 몹시 후회했었는데, 다행히 악보 복사본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지금 우리가 들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런 명곡이 작곡가의 충동때문에 날아갔으면 그게 무슨 손해야...


피소 말고 음반에 같이 실린 다른 곡들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In the mist, On an overgrown path 모두 상실, 적요, 침잠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네. 참 신기하다. 야나체크의 피아노 곡만 이러니...


쉬프가 ECM으로 레이블을 옮긴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쉬프의 ECM 음반들은 연주도 연주지만 ECM 특유의 피아노 녹음이 워낙 환상적이라 덕을 톡톡히 보는 듯. '안개 속'에서 '잡초가 우거진 오솔길'을 걷는 듯한 녹음은 곡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굳이 다른 연주를 찾아볼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