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지르고 들은 클래식 음반 95장 중 즐겁게 들었던 놈들을 뽑아보자!
10장(혹은 세트)을 골라봤고 순위까지 매길 자신은 없어 단순한 목록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2012년에 나온 음반이 아니라 글쓴이가 2012년에 산 음반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유의.
1. 샤이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L.V.Beethoven : The Symphonies
Gewandhausorchester
Riccardo Cahilly
Decca
2010년부터인가 '샤이와 얀손스가 베교 전집만 제대로 낸다면 지금 시대의 패권을 잡을 것이다'고 떠들고 다녔었는데 작년에야 비로소 샤이의 베토벤 전집이 등장했다. 난 올 3월에 이놈을 입수할 수 있었고 역시나 샤이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베토벤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
덧. 얀손스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12월 31일에 나올 예정이다. 난 아마 내년 1월 말은 되어야 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역시나 몹시 기다려진다.
2. 매케라스의 모차르트 교향곡 음반
W.A.Mozart : Symphonies
Scottish Chamber Orchestra
Sir Charles Mackerras
Linn
샤이의 베토벤이 2010년대에 베토벤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음반이었다면 매케라스의 모차르트는 2010년대에 모차르트를 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한때나마 매케라스에 대한 호평이 그라모폰의 뻔뻔한 영국인 띄워 주기가 아닌가 의심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한 음반. 어느 누가 이처럼 생생하고 즐거운 모차르트를 들려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모차르트를 다시 바라보게 해준 고마운 음반.
3. 파우스트와 아바도의 베토벤,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
L.V.Beethoven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61
Isabelle Faust
Orchestra Mozart
Claudio Abbado
Harmonia Mundi France (HMF)
이 음반의 등장은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었다. '파우스트는 베바협 녹음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베바협을?', '아바도가 프랑스 아르모니아 문디에?', '베바협 커플링이 베르크 바협이라니!'라는 3가지 의문에 휩싸여 지르지 않을 수 없던 음반. cantabile라는 말을 이보다 잘 구현한 연주가 있을까. 나긋나긋 부드럽고도 고혹적인 파우스트의 바이올린에 넋을 빼놓고 들어야만 했던 음반. 아, 이건 전적으로 베토벤 이야기. 베르크의 곡은 이 음반으로 처음 접해 뭐라 할 말이 없다.
덧. 이 음반만큼 커버가 멋있는 음반도 드물지 않을까. 클림트를 이렇게 멋들어지게 쓸 줄이야...
4. 린투의 라우타바라 교향곡 3번 외
E.Rautavaara : Symphony No.3, op.20
Royal Scottish National Orchestra
Hannu Lintu
Naxos
올해 서울시향에 린투가 지휘를 하러 온다는 소식에 예의상 린투의 음반을 하나 질러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래서 지른 음반이 이놈이다. 라우타바라는 예전 낙소스에서 나온 인키넨의 음반으로 처음 접했었는데 생각보다 곡이 재미없어서 그 음반 1장으로 관심을 끊었던 작곡가였다. 이 음반을 지르면서도 반신반의했었고.
하지만 이게 웬일. 버릴 곡이 없는 음반이 아닌가!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하는 Cantus Arcticus, 신나는 3악장이 돋보이는 피아노협주곡 1번, 거기에 노골적으로 브루크너를 연상시키는 교향곡 3번까지! 집에서 CD로도 자주 들은 것은 물론 밖을 돌아다닐 때 MP3로도 자주 들은 음반이다.
라우타바라는 분명 더 파고들 가치가 있다.
5. 에마르의 드뷔시 전주곡
C.Debussy : Preludes
Pierre-Lauren Aimard
Deutsche Grammophon (DG)
결단코 이 음반을 이벤트 상품으로 받아서 이 리스트에 올린 것이 아님을 우선 밝힌다!
이 음반을 처음 받고서도 쓴 얘기지만 나에게 드뷔시는 신 빈악파 3총사보다도 어려운 작곡가였다. 클래식을 처음 듣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영상이나 어린이의 세계 같은 곡들을 즐겁게 들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들어도 뭐가 뭔지 모르는 작곡가가 되어버렸다. 플라네나 바부제의 드뷔시 피아노곡 전집을 사놓고 열심히 들어봤지만, 그 둘로도 나의 의아함을 해소할 수 없었고.
에마르의 공연에 가 드뷔시 전주곡을 실황으로 들은 것이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음반으로는 느끼기 어려웠던 드뷔시만의 압도적인 음향에 난 제대로 홀려버렸고 덕분에 가장 기대했던 리게티 연습곡은 별 감흥 없이 듣고 오고야 말았다. 공연 한방으로 귀가 뚫렸다고나 할까.
이 음반은 공연에서의 감흥을 제대로 환기해준다. 내가 있는 다른 전주곡 음반들보다도 음향과 색채감에 중점을 둔 연주라서 그런가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
소리에 취할 수 있는 음반. 에마르님을 찬양합시다ㅠㅠ
6. 가디너의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 외
E.Elgar : Enigma Variations, op.36
Wiener Philharmoniker
Sir John Eliot Gardiner
Deutsche Grammophon (DG)
엘가는 참 재미없는 작곡가였다. 장황해서 들어주기 피곤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대놓고 질질 짜는 첼로 협주곡이나, 굳이 여러 번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잡다한 서곡들. '역시 영국 작곡가는 답이 없다'는 편견에 일조한 작곡가였다.
하지만 이 음반에서의 엘가는 다르다. 처음에는 가디너와 빈필과 엘가라는 조합이 무척 어색했었는데 이것 역시 내 편견에 불과했다. 독특한 편성의 '서주와 알레그로'는 물론 가슴 뭉클해지는 '수수께끼 변주곡'까지... 사실 이 곡들 역시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역시나 곡이 좋으면 그만이다. 두고두고 들을 소중한 음반.
7. 유로프스키의 오네게르 교향곡 4번 외
A.Honegger : Symphony No.4 [Deliciae Basilienses]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Vladimir Jurowski
LPO
오네게르와의 첫 만남은 카라얀의 오네게르 교향곡 2+3번 음반. '카라얀이 이런 것도 했네'라는 신기함에 별생각 없이 질러줬던 음반이었지만 난 오네게르의 두 교향곡을 전율하며 들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오네게르의 곡을 더 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었고.
그 결심의 후속타가 바로 이 음반이다. 오네게르의 교향곡 음반이 흔치 않고 있어도 2CD 전집으로 나온 것이 대부분이라 지르기 부담스러웠는데 교향곡 4번 낱장음반이 있기에 덜컥 질러버렸다. 유로프스키를 처음 만난 음반이기도 한데 유로프스키가 오네게르의 곡을 녹음했다는 사실이 좀 신기하기도 했고.
4번은 2번이나 3번처럼 심각한 곡이 아니라 기대에서 좀 어긋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은 건 매한가지. 교향곡을 포함해 같이 실린 곡들이 아기자기하고 밝은 분위기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음반이다.
이제 오네게르의 교향곡은 1번과 5번만 남았구나.
8. 정명훈의 브람스 교향곡 4번
J.Brahms :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Czech Philharmonic Orchestra
Myung-Whun Chung
Exton
이 1장은 고르기 무척 어려었다. 나머지 9개를 꼽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마지막 하나를 고르자니 눈에 확 띄는 것이 없어서... 고민하다 올해 이 음반의 4악장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서 선정하게 됐다.
정마에의 팬을 자처하기는 하지만 정마에의 독오 레퍼토리는 정말 답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서울시향, 아시아필과 했던 브람스 1번 2장은 들어주기가 괴로울 정도였고 DG에서 나온 서울시향의 말러 1번 2번은 발매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휘자의 명성에 해를 끼칠 정도로 떨어지는 수준의 연주라고 생각할 정도로.
당연하게도 이 음반의 발매를 알았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겨우 브람스 4번 하나 있으면서 무지막지한 가격을 받아먹는 EXTON의 가격 때문에 더 비호감이기도 했고.
하지만 어쨌든 빠를 자처하는 인간이기에 결국 지르게 되었고 내용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대를 전혀 안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브람스 4번은 (가디너를 예외로 치면) 내가 들은 어떤 연주보다 격정적인 연주이다. 특히나 4악장의 터질 듯한 에너지는 가만히 앉아 얌전히 듣기 힘들 정도. 이런 연주 스타일을 무척 꺼리는 취향이지만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데 어떻게 저항할 수가 없다.
9. 페트렌코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들
D.Shostakovich : Symphonies
Royal Liverpool Philharmonic Orchestra
Vasily Petrenko
한번에 6장이라니 반칙인가? 하지만 버릴 연주가 없기에 그냥 하나로 묶기로 했다.
워낙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이라 한 작곡가의 음반을 연속해서 지르지 않는데 올해 쇼스타코비치는 유일한 예외였다. 이미 4월에 바르샤이의 쇼스타코비치 전집을 질렀는데 6월에 또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음반을 6장이나 질렀으니.
하지만 페트렌코의 연주가 워낙 뛰어나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 하면 하이팅크니 콘드라신이니 하는데 페트렌코의 사이클이 완결된다면 쇼교 전집의 종결자가 되지 않을까. 당연히 하나씩 곡을 살펴보면 페트렌코보다 좋은 연주가 있지만, 전집의 완성도로는 페트렌코를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다. 예전 얀손스와 오슬로필의 차이코프스키 전집처럼 가끔 오케가 아쉬울 때는 있지만 얀손스 때와 마찬가지로 그건 배부른 불만이고.
덧. 이제 페트렌코의 쇼스타코비치도 4번, 7번, 13번, 14번 같은 굵직굵직한 곡들만을 남겨두고 있는데 발매소식이 들려오질 않아 애가 탈 지경이다.
10. 오페라
아무래도 이건 더욱 심각한 반칙인 것 같지만... 올해 음악감상에서 거둔 최고의 수확이라 어떻게 뺄 수가 없었다.
원래 어떤 장르이건 처음 접했을 때 듣게 되는 것들이 가장 주옥같은 작품인 법. 오페라 음반을 하나하나 살 때마다 매번 행복에 겨워 환호해야만 했던 건 무척이나 유쾌한 경험이었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듣게 되었나 땅을 치고 후회를 하기도 했고.
아직도 들어야 할 오페라가 잔뜩 남았다는 사실에 짜릿한 기분만이 든다. 내년에는 어떤 오페라가 날 즐겁게 해줄지...
이렇게 올해 즐겁게 들은 클래식 음반 BEST10 선정 완료. 안타깝게 떨어진 것들을 간단하게 언급해보면...
파비오 루이지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 같이 실린 4개의 마지막 노래가 별로였고 무엇보다도 알프스는 하이팅크+LSO의 압도적인 연주를 들은 바 있기에..
블롬슈테트의 닐센 교향곡 1-3
→ 즐겁게 듣긴 했는데 그렇다고 BEST 10까지 될까 싶어서.
이메르세일의 풀랑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외
→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최고였고 프랑스 모음곡도 무척 유쾌한 편성이었지만 전원협주곡이 너무 재미없어서.
아르헤리치의 라벨 밤의 가스파르
→ 밤의 가스파르는 놀랄 만큼 인상 깊게 들었지만 정작 기대했던 라벨 피협과 프로콮 피협 3번이 별로여서.
불레즈의 라벨 & 드뷔시 박스셋
→ 안타깝게도 이제야 1회전을 끝내서. BEST 10에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제 막 1번 들은 음반을 끼기가 좀...
이렇게 BEST 10을 선정해놓고 보니 결코 녹록치 않은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매해 이 짓을 하고 여기에 순위까지 매기는 어떤 선배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고. 아, 그분은 가끔 BEST만이 아니라 WORST도 뽑으셨지...
올해는 집에 처박혀 시험공부만 하다 보니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덩달아 음반도 평소보다 많이 지르게 되었다. 아직 내년의 거취가 불확실해 내년의 지름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올해만큼 음악을 많이 들을 수는 없겠지. 내년에도 올해처럼 클래식 위주로 오페라 레퍼토리를 하나씩 늘려가는 음악생활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올해 초 음악감상의 중심축이 클래식에서 재즈로 넘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오페라 덕에 클래식의 유통기한이 늘어났으니 사람 일은 모르는 법.
내년을 기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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