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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13.04.26 서울시향 오텔로 후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좋은 공연들이 있다.

애즈버리와 서울시향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인키넨과 시애틀 심포니의 바르톡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타로와 퀘라스의 듀오 공연
에머슨 쿼텟의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9번
쉬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32번
에마르의 슈만, 드뷔시, 리게티
샤이와 게반트하우스의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등등

 하지만 내 인생 최고의 공연은 금방 있었던 서울시향의 오텔로가 될 듯.





 베르디는 이번 달 리골레토를 듣게 되기 전까지 친해지지 못했던 작곡가였다. 본격적으로 오페라에 입문하기 전에 들었던 라 트라비아타는 지금까지도 하품만 나오는 곡이고 오페라 입문 이후 들었던 오텔로는 라 트라비아타보다도 지루했던 곡이었으니. 특히나 오텔로는 귀에 딱 들어오는 아리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데스데모나만 나오면 진행이 질질 늘어지는 기분인데다 바그너나 알슈의 오페라처럼 관현악만 들어도 설레는 종류의 곡도 아니라 더욱 그랬었고.


 그렇기에 서울시향의 2013 시즌에 오텔로 콘서트 버젼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예매를 하면서도 반신반의해야만 했다. 작년 하필 시험 전날이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예매하고도 가지 못한 한이 사무쳐 올해는 꼭 가야는 겠는데 하필 오텔로라니? 어쨌든 '이번 기회에 보지 못하면 다음에 보기 힘들다'는 생각으로 예매를 해뒀지만 정작 당일 예당을 가면서도 난 계속 투덜투덜 거렸었다. 새벽 4시까지 류현진 경기를 보다 자서 피곤하기도 했고 '오텔로를 잘해봤자 오텔로지' 하는 생각에...


 첫 오페라 관람인데도 자리에 앉아 연주자들이 입장하는 걸 멍하니 보던 나에게 정마에는 크게 한 방 먹이며 곡을 시작했다. 서울시향 공연을 꾸준히 다닌 것도 이제 5년 차고 정마에가 포디움에 있을 때의 서울시향에 익숙한 나인데도 그 긴장감이 팽배한 소리라니... 오텔로의 유명한 Esultate! 가 나오기 전부터 카시오의 목소리와 합창단의 기백에 내 몸에 쌓인 피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오텔로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리는 Esultate. 오텔로를 소화할 수 있는 테너가 드물다는 시대이기에, 오텔로가 조금이라도 약하면 순식간에 남은 시간이 괴로워지는 오페라이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텔로 역을 맡은 그레고리 쿤드가 왼쪽 합창석 위에서 홀로 터벅터벅 걸어와 터지는 Esultate... 아, 그렇구나... 오텔로의 Esultate 한마디만으로도 난 이슬람 놈들의 자존심이 바다에 묻혀버렸음을 기꺼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공연이 진정 대박일 것임을.


 누가 뭐래도 오늘 최고의 1등 공신은 오텔로였다. 배역 중 유일하게 모든 가사를 외우고 나온 그는 훌륭한 노래는 물론 콘서트 버젼인데도 멋진 연기까지 선보이며 오페라 관람은 처음인 나를 무척이나 즐겁게 해줬다. 2층에서 보는데도 오텔로가 이아고의 꾐에 넘어가 괴로워하고 좌절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잡혔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아고역의 사무엘 윤은 공연 전 내가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배역이었고 나의 예상은 당연히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공연을 보면서 얄미워 내려가 1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른 남자 배역(카시오, 몬타노)등과 함께 있을 때는 빛나는 이아고에 가려 남은 배역들이 안타까운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 오텔로에서의 이아고는 오그라드는 가사가 꽤 많고(특히 Credo in un Dio crudel~ 부분) 여기저기 자신을 가장하는 역이라 멋지게 소화하기 쉽지 않았는데, 오늘의 이아고에게는 전혀 불평할 거리를 느끼지 못했다. 특히 오텔로를 가리키며 Il fazzoletto(그 손수건) 할 때는 정말이지.... 괜히 바이로이트에 설 수 있는 분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카시오도 기억에 남는데 사람 좋지만 약간은 멍청한 카시오역도 즐겁게 들을 수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처음 1막 시작할 때 목소리가 좋으셔서 정신 차리고 공연을 본 기억이 나고. 단지 소프라노는 좀 불만이었는데 소리가 좀 울리는 경향이 있어 딕션이 잘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지금의 난 몇몇 오페라를 제외하고는(살로메, 삼손과 데릴라 정도?) 여자 배역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에 큰 감점 요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베르디와 오케스트라도 칭찬해주자. 오늘 공연을 들으며 '오텔로 재미없다'고 떠들고 다닌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Già nella notte densa~ 에서의 눈물 나는 첼로파트, Venere splende에서의 플룻 사용, 이아고가 카시오와 데스데모나의 대화를 보며 오텔로가 오길 바라는 장면에서의 바순 사용, 그리고 예전 말러 7번 공연 이후 간만에 본 만돌린 등등은 베르디가 왜 베르디인지를 나에게 각인시켜준 순간들이었다. 음반으로 들을 때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실연으로 들을 때는 감탄이 절로 나더라.


 한편 공연 전 정마에와 김선욱의 베토벤 신반을 리핑하고 한숨만 푹푹 쉬던 차였는데, 오늘 공연을 보니 정마에의 장기는 역시 오페라쪽에 있음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전체의 팽팽한 긴장감과 합창단 운용은 내가 듣는 오케스트라가 서울시향임을 잊게 해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예전 한예종 오케스트라의 알프스 교향곡 이후 오랜만에 보는 윈드머신, 안정적인 승차감(나는 금관의 안정감이 승차감과 무척 비슷하다고 느낀다)을 제공한 금관(특히 트롬본!), 정마에 아래의 서울시향다운 현악과 목관도 좋았고. 사실 내가 가장 신기했던 악기(?)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내는 묘한 그것. 4막 시작할 때 한 단원 혼자 왼쪽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있기에 저게 뭔가 궁금했었는데 멋지게 문 두드리는 소리를 내더라. 아, 베네치아에서의 사절이 도착하며 사방에서 호응하는 나팔소리를 내기 위해 합창석 좌 중 우에 각각 트럼펫 단원을 2명씩 배치해 멋진 효과를 낸 것도 잊어서는 안 되겠고.


 기억나는 장면을 말해보자. 물론 도입부에서 Esultate까지는 이 오페라에서 가장 멋진 장면 중 하나겠고, 이아고가 카시오에게 술을 권하는 장면도, 오텔로가 혼란을 진정시키는 장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오텔로와 데스데모나의 듀엣은 지금도 질질 끄는 장면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번 공연을 통해 아리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고. 2막 이아고의 자기 정체성 폭로(ㅋㅋ)와 오텔로를 의심의 구덩이로 모는 일련의 수작들, 오텔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에밀리아의 4중창 등등... 하지만 역시 2막의 마지막 Si, pel ciel 부분이 절정이었다. 원래부터 오텔로에서 유일하게 즐겨듣는 부분이었는데 공연에서 이 부분이 나올 때는 전율로 온몸이 짜릿짜릿해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을 정도니. 음악을 들으면서 이랬던 적은 처음인지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마지막 오텔로와 이아고가 서로 부둥켜안고 끝나는 부분 또한 압권이었고. 3막의 데스데모나를 추궁하는 의심에 사로잡힌 오텔로, 그런 오텔로를 다시 바닥으로 처박는 이아고의 술책, 베네치아의 사자가 도착했으나 그 앞에서 데스데모나를 윽박지르며 흉한 꼴을 보이는 오텔로와 그를 보고 '저자가 영웅인가?' 읊조리는 로도비코의 모습. 4막의 처음 데스데모나의 긴 한탄은 유일하게 내가 지루해했던 부분이었지만 곡의 비극적인 결말은 가슴을 울컥하게 하였고. 난 1막부터 감동으로 찔끔찔끔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지만, 곡이 끝날 때가 되니 여기저기 훌쩍훌쩍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당연하게도 곡이 끝나고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립박수가 이어졌고 나 또한 기립행렬에 동참하였다. 내가 기립박수를 쳤던 공연이 이번이 4번째였고.





 지금까지 오페라를 귀로만 들었던 나에게 '역시 오페라는 눈으로도 봐야한다'라는 평범한 진실을 상기시켜준 고마운 공연이었다. 정마에와 서울시향이 오페라를 더 많이 시도해줬으면 하는 바람과, 이제 오페라 공연을 열심히 찾아다녀야겠다고 결심한 나를 남긴 공연이기도 하고.

 아, 근데 나 수험생이잖아?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