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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까마귀의 노래 - 유치환

내 오늘 병든 짐승처럼

추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홀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여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까마귀 떼 날아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갖은 한 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두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 살아

오욕을 팔아 인색의 돈을 벌이하려거늘

아아 내 어드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증오하여 해도 나오지 않고

날씨마저 질타하듯 춥고 흐리건만

그 거리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노니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까마귀 모양

이대로 황막한 벌 끝에 남루히 얼어붙으려노라.


유치환, 청마시초


나를 시의 세계로 인도해 줬던 사람은 한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시 3~4편만 찾아도 성공하는 거라 나에게 일러줬었다.

유치환의 시집 '청마시초' 마지막에 실려있던 이 시를 보고 가슴이 얼마나 먹먹하던지...

가끔은, 아주 가끔은 짧은 시 하나가 어떤 음악보다도 영화보다도 깊은 울림을 줄 때가 있다.

그런 울림을 찾아 나는 계속 시를 읽는 것이고.


사랑을 하면 모든 노래가 나의 이야기라 느껴지듯, 지금의 내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이 시가 나에게 울림을 주는 것이리.

스스로 비노하여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지만, 그 거리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황막한 벌 끝에 남루히 얼어붙을까 생각해봤으나 나 또한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오욕을 팔아 인색의 돈을 벌이하려 하니.

삭풍에 늠렬한 하늘 아래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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